16부작 JTBC ‘설강화’가 지난 9일 9회를 방영하며 중반을 넘어섰다. 1~3%대 시청률과는 대조적으로 디즈니플러스 등 해외OTT에서는 순위권에 들며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이 드라마의 정체는 초반에 불거진 ‘논란’과 달리, 호수여대 기숙사에서 벌어진 간첩들의 인질극이었다.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장면은 없었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민주화 시대를 투영하고 있다.  

9회 방송에서 간첩 임수호(정해인 분)는 인질인 안기부 팀장에게 말했다. “어이 안기부 팀장. 정권의 횡포에 맞서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죽인 안기부. 공안정국 만들려고 죄 없는 동포들의 인생을 짓밟아온 정권의 개, 그게 안기부잖아. 거기서 월급 받아 처먹던 놈이 지금 누굴 비난해.” 

호수여대 사감 피승희(윤세아 분)도 안기부 팀장에게 말했다. “팀장님. 어차피 목숨 저당 잡힌 신세니까 말씀드릴게요. 비록 당신들의 힘에 굴복한 나약한 존재지만 죄 없는 사람을 간첩 만들어 출세하는 악마들한테 우리 학생들, 판 적 없어요.”

지난해 12월20일 ‘설강화’ 방영중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근거 없이 간첩으로 몰려서 고문을 당하고 사망한 운동권 피해자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주인공이 간첩인 남주인공을 운동권으로 오인해 구해주는 내용의 드라마를 만든 것은 분명히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임수호와 피승희의 대사를 이미 알고 있던 제작진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던 청원이다. 물론 누구나 오해할 수 있고, 문제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극 초반이었다. 다수 언론이 “국민청원 20만을 넘겼다”며 호들갑을 떨고 중계에만 급급하며 문제는 심각해졌다. 사전제작이 아니었다면 ‘설강화’는 9화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잘 만든 드라마는 아니다. 2020년 흥행에 성공한 ‘사랑의 불시착’(tvN)이 로맨틱 코미디로 남북의 갈등을 무겁지 않게 풀어냈다면 ‘설강화’는 로맨스도, 코미디도, 시대극도 아닌 불분명한 장르로 매회 무거움이 더해지고 있는 고구마 같은 드라마다. 드라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수여대 인질극 역시 개연성이 떨어지는 대목이 많다. 주인공들의 감정선도 매끄럽지 않다. 

하지만 방영금지를 요구할 만큼 이상한 드라마도 아니다. 인질로 잡혀있다 풀려난 호수여대 학생들은 곧바로 안기부에 끌려가 ‘입막음’을 당하고, 정권 재창출을 위한 ‘남북의 대선 합작공작’의 증거를 찾던 기자는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다소 작위적인 전개로 부족한 대목도 많지만, 적어도 민주화 열망으로 가득했던 1987년을 폄훼하지는 않았다. 

▲JTBC '설강화'의 주인공 임수호(정해인 분)와 은영로(지수 분). ⓒJTBC
▲JTBC '설강화'의 주인공 임수호(정해인 분)와 은영로(지수 분). ⓒJTBC
▲JTBC '설강화'의 주인공 임수호(정해인 분)와 은영로(지수 분). ⓒJTBC
▲JTBC '설강화'의 주인공 임수호(정해인 분)와 은영로(지수 분). ⓒJTBC

안기부장 딸 은영로(지수 분)는 안기부에 쫓기다 부상을 입은 임수호를 기숙사에 숨겨주기 위한 강한 동기가 필요했고, 그것은 ‘방팅’에서의 운명적 만남과 ‘운동권’이었으나 전방으로 강제징집된 오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간첩이 ‘운동권’ 행세를 하는 장면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은영로가 임수호를 ‘쫓기는 운동권’으로 오해할 때, 임수호는 부인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침묵은 부상을 치료하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인데, 이 장면이 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임수호는 진실을 말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눈빛을 여러 번 비추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목걸이를 주며 그 미안함을 전하기도 한다.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시대의 비극’이다. 

무엇보다 ‘설강화’는 간첩을 ‘만들어내던’ 1987년에 대한 반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드러낸다. 극 초반 안기부 요원들이 임수호를 찾기 위해 호수여대 수색에 나설 때도, 학생들은 “간첩이 침입했다”는 안기부를 불신하며 임수호를 목욕탕에 숨긴다. 인질로 잡혀있는 안기부 팀장조차 결국에는 “언제까지 안기부에 놀아나실 겁니까”라며 자신이 속한 조직을 부정해버린다. 

JTBC는 지난해 ‘설강화’를 두고 “군부정권 시절의 대선 정국에서 기득권 세력이 권력 유지를 위해 북한 정권과 야합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며 “(드라마는) 권력자에게 이용당하고 희생당했던 이들의 개인적인 서사”라고 밝히면서 “‘설강화’에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간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부 정치인과 대중은 ‘보지 않고’ 드라마를 재단하기 시작했고, 다수 언론은 무비판적으로 ‘폐지몰이’에 동참했다.

정부는 역사 왜곡을 이유로 드라마 방영금지에 나설 수 없다. 그러한 규정 역시 방송법에서 찾기 어렵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한 사후심의 정도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가 반복될수록 드라마 제작자들은 불합리한 자기검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런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선 드라마 방영금지 주장을 다루는 언론부터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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