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들이 행정부에 대량 기용되는 새 현상이 생겨 언론계는 마치 관계 진출의 발판, 아니면 ‘대기소’와 같은 인상을 준다. 행정부 인사 이동 바람이 불 때마다 편집국은 혹시 나에게도 어떤 ‘소명’이 없나 해서 좌불안석하는 개탄할 풍토까지 생기게 됐다. 오늘날 언론계는 팔리다 남은 찌꺼기의 쓰레기통처럼 됐다는 자탄의 소리가 현역의 입에서 흘러나오게 됐다.” (송건호 전집8, 228p. ‘우리의 언론현실과 민주화의 길’ 중 일부)

청암 송건호 선생(이하 송건호)이 1980년대 언론인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일이 많아지자 쓴 글이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언론인이 대선후보 캠프로 자리를 옮기고 있는 오늘 읽어도 뼈아픈 글이다.

청암언론문화재단,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 한겨레는 송건호가 고문 후유증으로 타계한 지 20년이 되는 날(12월21일)을 기리며 1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청암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를 열었다.

1953년 기자가 된 송건호는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대량 해직되기 직전 책임을 지고 편집국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1984년 해직 기자들과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련 전신)를 결성해 초대 의장을 지냈고, 1985년 월간 말을 창간했다. 1988년에는 한겨레 초대 사장과 회장을 지냈다.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청암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 현장. 사진=정민경 기자.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청암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 현장. 사진=정민경 기자. 

주제 발표를 맡은 박용규 상지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는 송건호 언론사상의 의미와 영향을 평가했다. 송건호는 1960년대 이후 언론인이 ‘기능인화’, ‘샐러리맨화’했다고 지적했다. 언론인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지조를 쉽게 버리는 현실을 개탄하며 언론인이 사상가적 자질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오늘날 극심한 언론 불신은 언론이 독립돼 있지 않고, 언론인이 기능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며 “언론은 ‘역사의 길’에 대한 고민이 없고, 언론인은 ‘자신의 영달’에만 집착한다. 언론 불신 시대에 송건호의 언론사상은 신뢰 회복이 어디에서 시작돼야 하는지 그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자 압박하는 ‘정파적 시민’으로부터 독립 중요”

토론자로 나선 권태호 한겨레 저널리즘책무실장은 송건호 시대와 오늘날의 언론 환경을 짚었다. 권 실장은 “송건호 시대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오늘날 기자들을 압박하는 또 다른 요소는 ‘정파적 시민’으로부터의 독립”이라며 “시민과 언론의 갈등과 긴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보수언론뿐 아니라 진보언론에까지 전방위에 걸쳐 형성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에는 ‘있는 내용만이라도 그대로 전달해 달라’는 사회적 요구가 ‘객관 보도’로 이어지고 있다”며 “그러나 언론이 언론으로서의 제 기능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송건호가 주창했던 것처럼 객관 보도에 그치지 않고, 이 사안이 지니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이런 진실보도 추구가 진정한 저널리즘이며 복잡다단한 오늘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저널리즘”이라고 말했다.

▲청암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 포스터. 
▲청암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 포스터. 

송종호 서울경제 기자는 ‘송건호 정신’ 확대를 주장했다. 송 기자는 “기자가 되기 전, 저널리즘에 대해 고민하던 친구들과 ‘대안언론에만 가지 말고 조중동으로 불리는 보수언론에 가서 우리가 변화시키자’ 같은 이야기를 한 적 있다”며 “(이런 말을 했던 것이) 어느덧 10년이 지났고 지금 제 모습을 보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송건호 정신은 확대돼야 한다. 좋은 보도를 한 기자라면 조중동 기자에게도 송건호 상을 수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송 기자는 “기자 개인보다는 언론 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언론 대주주의 적합성에 대해서는 더욱 깐깐해져야 한다. 기자 교육도 확대했으면 좋겠다”라며 “폭넓은 네트워크를 결성해 더 많은 기자들과 연대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혜정 한성대신문 기자는 대학언론 기자로서 기성언론의 기자 채용 방식이 변해야 한다고 했다. 한 기자는 “언론인을 지망하는 한 친구가, 건설사가 대주주인 언론사 최종 면접 장소에서 ‘건설사가 최대주주인 언론사 구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며 “이러한 면접이, 참된 기자를 뽑을 수 있는 형식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물론 오늘날 매체환경 변화가 심해 ‘송건호 정신’이나 송건호의 삶을 그대로 살기는 어렵겠지만, 송건호 삶을 보면서 내 삶을 되돌아보고 또 경계하는 지표로 삼는다면 그 정도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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