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중배는 임기 1년 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김중배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이 말은 자본 권력에 종속돼 가는 신문 언론을 내리친 죽비와도 같았다. 30년이 흐른 지금 언론은 자본에서 자유로운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언론인 1956명을 조사한 ‘2019 언론인 조사’를 보면, ‘언론의 자유를 직·간접적으로 제한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광고주(68.4%)가 가장 많이 꼽혔다. 언론인 스스로 광고와 자본에 의한 언론자유 위축을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 김중배 선생이 2018년 1월9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김중배 선생이 2018년 1월9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한국언론정보학회는 지난 27일 오후 서울 중구에 위치한 언론재단 미디어교육원 ‘가온’에서 김중배 뉴스타파 함께재단 이사장과의 대담을 진행했다. 김중배 선언 30년의 현재 의미를 되돌아본다는 취지다.

김 이사장은 30년 전 ‘김중배 선언’ 배경을 설명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당시 동아일보는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구미 공업단지 안의 두산전자에서 1991년 3월16일과 4월22일 두 차례 걸쳐 각각 페놀 30여 톤과 1.3톤이 낙동강으로 유출된 사건)을 심층 보도하던 언론사였다.

교수와 환경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시민 취재반’을 결성해 보도를 이어갔으나 경영진의 압력은 점차 거세졌다. 김 이사장은 이날 대담에서 “보도에 관해 사주를 통한 공공연한 압력이 계속됐다. ‘대광고주인 두산을 그렇게 비판하면 신문 경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압력이었다. 얼마 뒤 편집국장에서 해임됐다”고 술회했다.

김 이사장은 “우리는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항쟁을 통해 정치 민주화 궤도에 진입했으나 자본 권력에 대한 대응은 매우 취약한 상황에 있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고도화하고 있는 ‘디지털 자본주의’에 대해 “우리는 또 다른 자본권력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다”며 “우리 제조업 공장들에 배치된 가동 로봇이 그 밀도에 있어 세계 1위라는 보도도 있었다. 아날로그 시대의 자본권력을 압도하는 새로운 형식의 자본 압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전망했다.

▲ 한국언론정보학회는 지난 27일 오후 서울 중구에 위치한 언론재단 미디어교육원 ‘가온’에서 김중배 뉴스타파 함께재단 이사장과의 대담을 진행했다. 김 이사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언론정보학회 유튜브 채널 갈무리
▲ 한국언론정보학회는 지난 27일 오후 서울 중구에 위치한 언론재단 미디어교육원 ‘가온’에서 김중배 뉴스타파 함께재단 이사장과의 대담을 진행했다. 김 이사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언론정보학회 유튜브 채널 갈무리

김 이사장은 “빅데이터 시대에 빚어질 수 있는 인권 침해를 염두에 둬야 하며 디지털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인사이트 저널리즘, 솔루션 저널리즘 등 여러 용어가 나오지만 우리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언론인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대담 패널로 출연한 김은지 시사IN 기자는 2017년 보도한 ‘장충기 문자’를 자본과 언론의 유착 사례로 들었다. 장충기 문자 보도는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한국사회 유력 인사들과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특히 유력 언론인들이 삼성 고위 인사에게 전달한 낯 뜨거운 충성·감사 메시지가 고스란히 보도됐다.

김 기자는 “당시 기자 연차 7~8년 됐을 때인데,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내가 봐도 장충기 문자 내용은 충격적이었다”며 “장충기라는 삼성의 최고위 인사에게 언론인들이 광고 청탁으로 허리를 숙이고 취업 청탁으로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너무 낯 뜨거웠다”고 비판했다.

김 기자는 “더 놀라운 사실은 문자가 폭로됐음에도 내부에서 문제를 지적한 언론사는 일부였다는 점”이라며 “미디어비평지 중심으로 장충기 문자 속 언론인을 비판했을 뿐 우리 보도를 추가 취재하거나 받아쓰는 기사는 많지 않았다.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패널인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30년 전과 비교하면 언론 상황은 악화했다. 단순히 콘텐츠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라며 “언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환경 자체가 악화하고 있다. 이는 저널리즘을 저해하는 강력한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언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리사회 구조화한 갈등, 이를테면 부의 양극화, 정치·사회 양극화를 부추기며 사회적 논의를 막고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김 교수는 기자 집단을 ‘기레기’로 매도하는 사회적 현상에는 우려를 표했다. 그는 “일상적으로 ‘기레기’라는 표현을 쓰는 건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라며 “기레기라고 불려도 마땅할 기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여전히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자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어 “뉴스를 소비하는 한정된 시간에 어떻게 하면 양질의 콘텐츠를 구독할 수 있을지 등 뉴스 플랫폼 환경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기레기’라는 말은 건설적 논의를 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에 최소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이사장은 “시장 만능주의가 우리 삶 속에 스며들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저널리즘은 어떤 기준을 정립해야 하는가. 이 주제에 관해 우리 (언론학) 연구자들이 꾸준히 고민해주셨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뉴스 플랫폼에서 조회 수에 따라 광고비가 나오고, 아무리 좋은 기사여도 사장되어 버리는 현실 속에서 내가 우리 젊은 언론인들에게 무엇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라며 “다만 (언론인 가운데) ‘선배 시민’은 언론 토양에 (시장 만능주의를 극복할) 의지와 결기가 살아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주셔야 하지 않나 싶다. 나는 늙고 용기가 사라져 더 말씀드리기 어렵고 괴롭다.(웃음) 선언의 소회로 말씀을 드렸다”고 마무리했다.


언론인 김중배는 누구?

언론인 김중배는 1957년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민국일보를 거쳐 1963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일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과 논설위원을 지낸 후 1990년 편집국장에 취임했으나 이듬해 자본의 언론 통제 속에 경질됐다.

1993년 한겨레신문 사장, 2001년 MBC 사장을 지냈다. 참여연대와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광장 대표로 시민운동과 언론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동아일보 논설위원 시절인 1987년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졌을 때 김중배는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고 썼다. 시대의 죽음을 직시한 칼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중배는 1991년 9월 자본과 사주의 편집권 개입에 맞서 ‘김중배 선언’을 남기고 동아일보를 떠나 언론 운동가 길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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