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이’는 혐오 표현일까. 이 질문에 주변 친구들과 논쟁을 벌인 적 있다. 언어 수용자가 불편함을 느낄 경우 단어 사용을 재고해봐야 한다는 의견과 일방적으로 혐오 표현으로 낙인찍고 규제하기보다 공론장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나는 전적으로 후자의 입장이었다.

언어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는 건 현실이다. 언어는 어제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고, 낡은 사고가 잔재로 남아 있기도 하다. ‘아줌마’라는 단어는 그대로인데 사회적 반응은 과거와 다르다. 중년 여성을 비하하는 데 왕왕 활용됐던 이 표현은 언어 사용자 선택을 예전처럼 받지 못하는 추세다. 

이런 고민이 깊어질 때 손에 집어 든 책이 지난 9월 출간한 ‘언어의 높이뛰기’다. 저자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민감도는 서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격차가 크다”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언어 감수성이다. 말을 할 때, 글을 쓸 때 우리는 듣는 사람 혹은 읽는 사람의 감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잘 들리고 잘 읽힐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역지사지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조언이다. 신 교수를 10월15일 오전 고려대 인문사회계 캠퍼스 구법관에서 만났다. 

▲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10월15일 오전 고려대 인문사회계 캠퍼스 구법관에서 참여사회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한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10월15일 오전 고려대 인문사회계 캠퍼스 구법관에서 참여사회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한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 코로나19 국면에서 듣게 되는 단어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팬데믹’, ‘부스터 샷’ 등은 처음 들었을 때 뜻이 와 닿지 않았다. 반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단어는 유행처럼 번졌다. 정부 지침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한 단어였다. 

“소셜 디스턴싱(social distancing) 개념을 한국어로 표현한 것이 ‘사회적 거리두기’다. K-방역 숨은 1등 공로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소셜 디스턴싱은 쉽게 와 닿지 않는 개념이다. 언어가 누구를 향하는지 의식하지 않는다면 ‘팬데믹’, ‘코비드19’처럼 ‘소셜 디스턴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단어를 통해 개념이 보다 명확해졌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비말’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전문가들과 언론은 전문용어라며 비말이라고 부르고 다녔는데 찾아보니 ‘침방울’을 뜻했다. 침방울이라고 하면 모두 알아들을 텐데 왜 비말이라고 할까. 이번 책에 ‘코로나19 시대의 언어 풍경’이라는 챕터가 있는데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담았다. ‘위드 코로나’, ‘팬데믹’, ‘부스터 샷’. 이런 단어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말은 상대를 향한다. 말과 글은 쉽게 들리고 잘 읽히기 위해 하는 행위다.” 

- 왜 이런 단어를 쓰게 되는 걸까?

“번역하는 태도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도 우리 언어를 개발자 관점에서 바라본 적 없다. ‘부스터 샷을 어떻게 번역하지?’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보다 알기 쉽게 ‘추가 접종’이라고 부르면 된다. 번역을 하더라도 자세는 달라야 한다. 우리가 우리 언어로 우리 개념을 만든다는 개발자 자세가 필요하다.” 

- 2018년 ‘언어의 줄다리기’에 이어 최근 ‘언어의 높이뛰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언어생활을 운동 경기에 비유한 이유가 있나?

“말을 할 때 우리 마음속에 줄다리기가 일어난다. 언어의 줄다리기는 딴죽 거는 게 아니다. ‘이 말을 하자’ ‘저 말을 쓰자’ 서로 줄다리기를 하는 거다. 이면에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싸움이 있다. 언어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특징이 있다. 언어는 과거의 산물이고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오늘 이런 표현이 있는 건 어제의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그 표현이 내 마음에 걸리는 건 내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뀐 내 생각이 이 언어에 담기지 않아 불편한 것이다. 언어가 우리 생각을 담지 못했다면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할까, 언어를 바꿔야 할까? 더구나 우리 생각이 진보한 생각으로 바뀌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언어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어제의 표현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해서 오늘 그 표현이 불편해지는 순간, 그때가 우리에게 줄다리기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바꾸는 노력이 힘들다고 낡은 언어를 바꾸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물려줄 것인가.” 

▲ 신지영 교수 연구실에 붙은 표어. 사진=이한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 신지영 교수 연구실에 붙은 표어. 사진=이한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 ‘언어의 높이뛰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의 높이뛰기가 있어야 진정한 생각의 높이뛰기가 완성된다. 줄다리기가 관전자 입장이라면 언어의 높이뛰기는 행위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바꿔보자고 하면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설사 언어를 바꿔야 한다고 공감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행위자가 되어 언어를 바꾸는 데 노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저항감을 가져야 한다. 저항하는 과정은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언어의 높이뛰기를 했다면, 우리 생각에 진보가 담긴 것이다. 초등학교로 바뀐 언어는 황국신민의 학교 의식을 벗어났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높이뛰기가 완성될 수 없다. 우리 모두 높이뛰기를 하자. 언어는 사회 진보 지표다. 목표 높이가 올라가는 건 우리 사회 수준이 올라가는 것과 같다. 그런 개념으로 높이뛰기라고 이름을 지었다.” 

- 언어와 표현에 대한 시비가 많아지고 있다. 비판과 규제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프로불편러’라고도 꼬집는데?

“‘프로불편러’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우리 모두 프로불편러가 되기 위해 토론하고, 공부하고 연구도 하지 않나? 언어는 습관이다. 습관이기 때문에 익숙하다. 익숙하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언어라는 사회적 약속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쉽고, 우리는 당연하고 익숙한 현상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일인데도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프로불편러는 굉장히 고독한 사람들이다. 고독한 선구자다. 선구자들이 어떻게 좋은 이야기를 듣겠나?(웃음) 언어의 높이뛰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높이뛰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높이뛰기를 완성해가면 그게 습관이 되고 점점 불편함이 사라진다. 높이뛰기를 오늘의 내가 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 세대가 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 질문에 우리는 답해야 한다.” 

- 작가 장강명은 ‘깜깜이’라는 말이 혐오표현이라는 주장에  “누군가 그렇게 선언하면 그다음부터 그 단어는 실제로 혐오스럽게 들린다”며 낙인찍기를 우려했다. 듣는 사람이 불편하다고 해서 언어를 다 바꾸고 교체해야 하는 것인가? 

“관련한 이야기로 어떤 방송에 나가 ‘반팔이라는 말을 고민해보자’고 했다. 반팔은 온전한 팔의 반이라는 뜻이다. 정상성을 기초로 만들어진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반팔은 팔이 반이 아니라 소매가 반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팔이 짧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실제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깜깜이도 비슷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보통 ‘네가 틀렸어’라고 하면, 방어기제를 발동하기 마련이다. 환호하면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지만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논의를 통해 받아들일지를 결정하고,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건 사회 구성원 몫이다. 말은 상대를 향한다. 만약 듣는 사람이 불편하다면, 또 다른 말로 대체가 가능하면 ‘깜깜이’ 같은 경우도 다른 말을 쓰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깜깜이’의 사전적 정의는 비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언어에는 사전적 의미가 있고 연상적 의미도 있다. ‘아줌마’, ‘아저씨’도 사전적 의미로는 비하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비하적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비하적 표현이 되는 거다. 사람들이 이 단어 사용을 다소 지양하는 것은 연상적 의미 역시 언어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단어가 비하하는 상황에서 많이 쓰인다면 개선이 필요하다.”
 
-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할 수는 있지만, 부적절한 표현을 썼다고 ‘혐오주의자’, ‘차별주의자’라고 단정하거나 낙인찍는 것은 싸움하자는 것 아닌가? 소통을 막고 논의를 더 극단화하는 태도인데? 소통 공간을 마련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표현을 지적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봐야 한다. 공격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보를 위한 것인가. 판단은 시민들이 하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이다. 표현 지적에 ‘요즘 피곤해 죽겠다’, ‘프로불편러가 왜 이렇게 많아’라고 반응할 수 있지만 문제 제기는 시민사회 진보를 의미한다. 언어에 민감하다는 것, 그것이 언어 감수성이다. 언어는 상대를 향한다는 점에서 이제야 비로소 상대에게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의식했다는 것이다.”

▲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10월15일 오전 고려대 인문사회계 캠퍼스 구법관에서 참여사회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한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10월15일 오전 고려대 인문사회계 캠퍼스 구법관에서 참여사회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한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 내년 대선이 있다. 정치의 계절이고, 정치는 말로 한다. 정치인의 말은 어때야 하나?

“20대 국회 마지막은 막말 대잔치였다. 그러나 21대 총선에서 막말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떨어졌다.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 정치인 수준이 시민사회 성숙도를 못 따라가는 것이다. 국회는 늘 ‘언어의 줄다리기’가 일어나는 곳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인과 같이 힘을 가진 자와 유권자의 언어 격차가 줄어들수록 성숙한다.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서라도 정치인들이 떨어지는 언어 수준에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

- 만약 대중 앞에서 말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정치인이 신 교수에게 자문을 구한다면?

“먼저 그런 고민을 했다는 점을 칭찬하고 싶다. 대부분 정치인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한 번의 상담과 자문에 개선되지 않겠지만 지속적인 말하기 훈련은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나라에서 말하기 훈련이 이뤄지는 곳은 ‘다, 나, 까’로 끝나는 말을 쓰라고 가르치는 군대 말고 거의 없다.(웃음)” 

- 법조계 언어 진입장벽이 높다는 지적이 있다. 법조계 언어는 왜 난해한 것일까? 

“전문가들이 어려운 말을 쓰는 이유는 나한테 편하기 때문이다. 법조계 인사들에게 물어보면, 본인들도 공부할 때 단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진입장벽만 넘으면, 그때부터 그 사회 법조 언어를 독점할 수 있다.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다. 언어가 무서운 점이다. 의학과 법학이 특히 그렇다. 그러나 민주주의 성숙 지표는 한 사회 언어가 시민들 눈높이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있다.”

- 법조계와 의료계의 언어 장벽, 어떻게 넘어야 하나?

“그들도 노력해온 것이 사실이다. 법제처 같은 경우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변화도 있었다. 예를 들면, ‘징역6월’에 처한다고 하지 않고, ‘징역6개월’에 처한다고 하거나 ‘정상을 참작하여’라는 말 대신 ‘사정을 고려하여’라는 표현을 쓴다. 결국 시민들이 얼마나 목소리를 내느냐가 중요하다. 시민들이 요구할수록 변화 가능성이 높아진다. 판결문을 받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내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판사들이 문제인 것이다.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을 하는 전문가는 내가 아니라 전문가 그 자신에 문제가 있다. 진짜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성을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시민들이 요구하지 않으면 권력은 나뉘지 않는다.” 

- 전문 언어를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에도 비판적이다. 

“기자들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걸 그대로 적는다. 묻고 싶은 건, 언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누구를 위해 보도하는가? 언론은 시민을 위한 것 아닌가. 그러면 시민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게 보도해야 한다. ‘비말’이라고 했으니 그대로 비말이라고 쓴다? 전문가들이 그렇게 쓰니까 시민들도 따라 쓰라? ‘위드 코로나’, ‘부스터 샷’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알기 쉽게 풀어줘야 할 것 아닌가. 기자들이 ‘워딩’, ‘데스킹’ 이런 말 많이 하는데 기자들끼리 쓰면 될 말을 보도를 통해 그대로 전한다. 언론인도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만의 언어’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시민들에게 보다 쉬운 언어로 전달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기자와 그렇지 않은 기자가 내놓는 결과물은 차원이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10월15일 오전 고려대 인문사회계 캠퍼스 구법관에서 참여사회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한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10월15일 오전 고려대 인문사회계 캠퍼스 구법관에서 참여사회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한나 참여연대 미디어홍보팀 간사

- 고유어는 격이 낮거나 쉬운 말, 한자어는 격이 높고 식자층이 쓰는 말이라는 인식이 여전한 것 같다. 

“과거 고유어를 쓰는 사람들은 범인(凡人)이고, 한자어를 섞어 사람은 식자로 분류됐다. 말에 대한 태도가 생성된 것이다. 한자어는 고상하고 고유어는 격이 낮다는 인식이다. 어문규정을 보면, 외래어 표기법에서 경음인 말은 쓰지 못하게 했다. ‘카페’라고 써야지 ‘까페’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버스’는 되는데 ‘뻐쓰’는 안 되는 식이다. 경음을 마치 죄인 취급하는데, 소리에는 죄가 없다. 과거 국어학자들은 격음과 경음이 많아지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고 주장했다. 근거가 없는 말이다. 요즘 학자들은 수준이 높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경음을 천시하는 현상은 한자음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한자음에는 경음이 없다. 끽(喫), 쌍(雙), 씨(氏)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경음은 가장 늦게 만들어진 소리고 한자음은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져 이어온 탓에 경음이 거의 없다. 고상한 한자어에 경음이 없으니 경음은 고상하지 못한 소리라는 잘못된 믿음이 이상한 어문 규정을 만든 것이다. ‘짜장면’을 ‘짜장면’으로 부를 수 있게 된 날, 짜장면이 사면을 받은 날, 한 칼럼에 ‘짜장면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우리는 언어의 주인인 언어 사용자들의 주도가 아니라 관이 주도하는 어문 규범을 만들어왔다.”

- 불통의 시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상대에게 존댓말을 듣는다는 건, 상대방이 나를 어른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그만큼 내가 어른스러워져야 하는구나.’ 어른스럽다는 것은 성숙을 의미한다. 존댓말을 듣는다고 권력자 행세를 하면 그건 ‘꼰대’ 아닌가. 우리 50대~70대 어른들이 성숙함을 더 발휘했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야기하는 ‘꼰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아, 이번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에선 ‘너 몇 살이야’라고 묻는 꼰대 질문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지난 2017년 대선에는 나왔었다.”


인터뷰는 본지 김도연 기자가 참여연대의 월간 매거진 ‘참여사회’ 인터뷰어로 참여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참여사회 2021년 11월호(통권 290호)에 실렸습니다. 인터뷰 전문은 미디어오늘과 참여연대 홈페이지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인용 시 ‘참여사회’ 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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