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심야의 드라마 촬영 현장, ‘막내’ 스태프 A씨는 상급자인 B로부터 갑작스런 폭언을 들었다. A가 촬영 장소를 정리했다는 이유로 “지시하지 않은 일을 했다”며 “개XX” 등 욕설이 15분가량 이어진 것이다. 이후 A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밝힌 뒤에도 괴롭힘은 이어졌다. 점심 시간에 술을 마신 채로 A를 불러낸 B는 또다시 욕설을 섞어가며 1시간가량 폭언을 퍼부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를 비롯한 방송·미디어 단체들이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의 사건 진상을 조사하고 22일 관련 경과를 공개했다. 국내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관행처럼 이어져 온 언어폭력 등을 ‘일터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관련 조치를 공개한 이례적 사례다.

진상조사는 지난해 8월 한빛센터의 익명 제보 창구(미디어신문고)에 사건이 접수되면서 시작됐다. A는 자신이 현장을 떠난 뒤 B가 보인 태도가 공론화를 결심한 계기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A가 일을 그만둔 뒤에도 B가 사과는커녕 주변 스태프들에게 연락해 “원래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욕도 하고 좀) 그러지 않냐”라며 무마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빛센터, 희망연대노동조합,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4개 단체로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해 11월부터 1년 가까운 조사 결과 이번 사안을 “명백한 일터 괴롭힘”이라 규정했다.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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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부당한 폭언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으로도 확인됐다. 조사에 응한 목격자는 “폭언과 욕설이 오간 장소가 20~30m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들릴 정도로 폭력적”이었다며 “잘못한 것에 대한 질책이 아닌 모멸감을 줄 정도였고 ‘가스라이팅’이라 생각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목격자는 “다른 사람들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심하게 욕을 하는 사람은 난생 처음 봤다”면서도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 못해 개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사용자·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 욕설이나 모욕적 언행, 정당한 의견을 무시하는 행위 등도 ‘괴롭힘’에 포함된다. 그러나 초장시간 근로가 만연한 방송·미디어 제작 현장의 스태프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왔다.

조사위는 “쫓기는 촬영 일정과 카메라 등 방송 장비들이 즐비한 위험한 현장에서 ‘안전’을 위해 욕설이 오가는 것쯤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는 인식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드라마만의 문제는 아니다”라며 “한국의 방송은 ‘그럼에도 방송은 나가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제작, 유지되며 스태프들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 인권은 간단히 무시돼 왔다. 여전히 드라마 스태프들의 안전은 위협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같은 인식은 B의 조사 당시 답변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다. 드라마 촬영 현장이 “위험하다”며, 긴장을 놓으면 안 되기에 스태프들을 강압적으로 대할 때가 있었다고 답한 것이다. 조사위는 정말 스태프들의 안전을 위한다면 제작 환경이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지 않는지, 스태프들이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고 충분한 수면·휴식시간을 보장받고 있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의 안전은 고성, 욕설로 지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된 관행을 고착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방법”이라는 지적이다.

다만 B씨는 수개월간 조사를 거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A씨에 대한 사과문을 작성했다. 사과문에서 B는 “예전과 많이 달라진 현장 속에서 행동, 말투를 고쳐야 될 필요성도 느끼고, 쉽게 한 번에 바뀐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조금씩 노력하고 한 번 더 생각을 하는 계기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A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스태프분들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비롯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고 전했다. ‘진상조사결과 부정 및 2차가해’를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에도 서명했다.

조사위는 이 사과문을 공개하며 “사과문 공개는 피해자의 치유와 일상으로의 복귀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라 판단했다”며 “가해자 입장에서도 본인의 행동을 돌아보고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밝혔다. “가해자 또한 진상조사위원회와 소통을 통해 면접조사와 사과문 작성까지 성실히 따라 준 것은 좋은 선례로 남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피해자 A씨는 “이 사건이 화두가 돼서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다른 분들에게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조사위 면접을 통해 밝혔다. 조사위 또한 이번 사건이 방송현장의 일터 괴롭힘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길 바란다며 “방송제작 현장 내 폭력 근절은 결국 법제도 시스템과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드라마 제작 현장이 위계가 아닌 협력과 화합으로 변화하기 위해 정부와 방송사, 드라마 제작사들이 책무를 방기 하면 안 될 것”이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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